읽으며 했던 생각

  1. 이 책은 “21세기 한국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민주적인 문자, 한글로 극적인 민주화를 이루어 왔으면서도 가장 비민주적인 문법에서 묶여 갈등하고 있다.”라는 말과 함께, 한국 사회의 존대법에 대해 파고든다. 존대법은 한국 사람들의 의식구조에 깊게 뿌리 박혀 대화할 때 말의 내용과 논리보다도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어떻게 전달할지를 생각하게 만듦으로써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들고, ‘나이’에 대한 민감성이 “질서와 권위에 대한 순종을 종용”하며 사람들을 “‘젊은 놈이 건방지고’, ‘어른이 주책이 되는’ 제한된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어 도전정신을 꺾는다고 말한다.
    이외에도,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의 존대 문화, 존대법에 내재된 계급주의, 존대법의 양면성, 특히 하대법과 반말, 과잉존대 현상, 이러한 존대 문화가 한국인의 정신과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발목 잡고 있는지, 나아가 앞으로 한국어 존대법이 가야 할 방향 탐색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존대법’을 다룬다.
  2. 언어가 우리 사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보다 구체적으로 한국어에 내재된 문화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평등한 대화와 토론을 막고, 생각하는 힘을 무력하게 만드는지 알고 싶은 사람에게 강력 추천하고 싶은 책.
  3. 미국에서 인턴 할 때 상사를 이름으로만 부르는 게 너무 어려웠던 내가 떠올랐다. 그래서 한동안은 상사에게 할 말이 있을 때마다 이름을 직접적으로 부르기보다 굳이 근처로 가서 하고 싶은 말로 먼저 운을 떼곤 했다.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느라 눈치도 많이 보고, 항상 조심스러웠다. 다들 친절했지만 친해지기 어려웠다. 시간이 지나 이름을 부르는 데 익숙해지자 금세 이 벽이 허물어짐을 느꼈고, 회의에 참여할 때는 시니어든, 주니어든, 인턴이든 모두가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그것을 서로 존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위계 없는 이런 토론 문화는 내게 산뜻한 충격을 줬고, 좋은 의미에서 신세계였다.
  4. 말의 힘. 언어적 무례함이 사람들의 업무 수행 능력을 50% 이상 급격히 떨어트린다고 한다. 무례한 말을 들었을 때, 상대가 왜 자기에게 무례한 코멘트를 했는지, 그 코멘트가 자기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헤아리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며, 이런 과정은 그들이 당장 처리해야 할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들의 정신적인 에너지를 소진시켜 버린다고.
  5. 외국인에게 한국어가 어려운 진짜 이유. 한국어는 외국인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언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으쓱해 하는 한국인도 있을 것이다. 주로 외국인들은 한국어의 ‘존대법’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데, 사실 이 어려움의 근본적인 이유는, 문법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운 기준들을 근거로 사람들을 위아래로 나누고, 그 서열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존대법에 내재된 계급주의적 인간관 때문”이라고 함.
  6. 말이 먼저냐, 사고가 먼저냐고 했을 때 사고가 먼저고 말은 수단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 사고에 미치는 영향도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다”라고 한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외국어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모국어로는 어색하거나, 낯설거나, 혹은 없는 표현을 발견했을 때 그 표현으로 인해 이전에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관점에서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고,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또, 두 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건 그만큼의 다른 세계를 사는 것과 같다고도 하는데 앞서 말한 같은 맥락에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언어로 인해, 새로운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끼고, 경험할 수록 그만큼 어제와 똑같은 삶도 오늘은 다채롭게 보이고, 결국 삶이 더욱 풍요로워지는 것 같다.

 

목차

제 1장. 한국인의 정신을 지배하는 한국어 존대법
제 2장. 한국어 성경의 예수 존대 딜레마
제 3장. 존대법의 두 얼굴, 존댓말과 반말
제 4장. 권력에 아부하는 호칭
제 5장. 21세기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존대법
제 6장. 변화하는 사회, 진화하는 존대법

 

일부 발췌 (페이지)

  • 존댓말 때문에 한국인들은 예의 바르다고 여겨지지만, 반말이 발달한 만큼 무례하기도 하다. (…) 존대법은 예의와 무례를 동시에 포함하는 이율배반적인 어법이다. 두 얼굴의 한국어 존대법은 단순히 문법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인의 의식 전체를 지배하는 동인이며, 한국 사회를 돌아가게 만드는 회전력이다. 한국어 존대법은 한국인의 의식구조와 한국의 서열 문화의 핵심을 들여다볼 수 있는 블랙홀이다. (14)
  • 한국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존대법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아이들에게 강요되는 존대법은 단지 ‘-요’를 붙이는 문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너보다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주입시키는 과정이며, 사람 간에는 항상 위아래가 있다는 것을 세뇌시키는 과정이다. (15)
  • 존대법은 말하는 내용과 그 논리성보다 윗사람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를 먼저 생각하게 만들고, 윗사람과 평등한 관계에서 생각하고 대화하는 정신을 가로막는다. (15)
  • 한국식 공손함은 기존의 질서와 권위에 대한 순종을 종용한다. (16)
  • 윗사람이니까 무조건 존대하고 윗사람의 생각을 무조건 따르는 공손 태도로는, 그리고 자신보다 순위가 높은 것 앞에서 스스로를 지나치게 낮추는 공손 태도로는 세계 최고가 될 수 없다. (16)
  • (…) 튜더의 발견 중에서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이 있다. 한국에서는 나이가 어린 아랫사람은 뭉뚱그려 그저 ‘동생’ 하나로 충분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랬다. 연장자는 ‘형, 오빠, 누나, 언니’로 나와 윗사람의 성별까지 구분해서 신경 쓰고 높여 부르면서, 아랫사람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거나 배려할 필요도 없고, 그저 ‘아랫사람’이라는 이름 하나로 충분했다니! (33-34)
  • 존대법에서 시작된 나이에 대한 민감성이 한국인의 의식구조 속에서 모든 인간관계를 파악하는 기본조건으로 확산된다. 그리고 그 사람의 행동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에서부터 ‘그렇게 나이가 많은데도’까지 상식적으로 어떤 나이에는 어떠해야 한다는 기준을 두고 그 기준에 맞추어 사람을 평가한다. 그러나 이런 습관은 우리를 ‘나이’에 묶어버리는 올가미가 된다. ‘젊은 놈이 건방지고’, ‘어른이 주책이 되는’ 제한된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도전 정신과 용기를 갉아 먹는 독이 된다. (36-37)
  • 한국어 존대법과 호칭법은 서로의 관계를 위아래로 나누고 그 서열을 상대에게 확실히 각인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언어장치이다. (39)
  • 외국인들에게 한국어 존대법이 어려운 진짜 이유는 복잡한 존대 문법 때문이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운 기준들을 근거로 사람들을 위아래로 나누고, 그 서열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존대법에 내재된 계급주의적 인간관 때문이다. (57)
  • (…) 미국처럼 서열을 따지지 않는 언어 문화는 평등한 대화를 가능하게 하지만, 서열을 엄격하게 따지는 문화는 위기의 순간에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자기 생각을 솔직하고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폭탄이 된다고 했다. (60)
  • (…) 존대법은 대화 내용의 진위나 논리에 집중하기 이전에 사람 간의 위아래를 따지고 표현하는 데 에너지를 사용하게 만들고, 그러는 사이에 실제로 중요한 대화 내용 파악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91)
  • (…) 최고가 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남들과 비교하여 일렬로 줄을 세웠을 때 제일 앞자리에 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다르고 독특하게 되는 방법이다. (148)
  • 한국의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그룹에서 가장 앞선 사람이 되기를 기대한다. 부모들은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학교에 가면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고 훈련시킨다. 학생의 능력은 시험 점수로 확인되고 시험에는 항상 정답이 있다. 학생은 선생님의 설명을 잘 듣고 그것을 암기하면 된다. 반면에 유대인 부모들은 아이가 ‘남보다 뛰어난 사람’보다는 ‘남과 다른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유대인 부모는 ‘학교에 가면 반드시 질문하고 와야 한다’고 훈련시킨다. 학교 수업은 토론 위주로 진행되고 학생의 능력은 토론능력으로 평가되며 토론에는 정답이 없다. 자기 생각을 얼마나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가, 얼마나 독창적인 생각을 하는가가 기준이다. 유대인은 평등한 관계에서 질문하고 토론하기를 배우는 것이 교육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생각한다. (149)
  • 메이어는 서양과 한국의 교육모델을 비교하면서, ‘서양의 교육모델은 의심에서 출발하는 회의주의가 바탕이며, 질문법이 서양식 교육의 주축을 이룬다. 따라사 서양에서는 교사가 설명하는 것은 언제든지 이의 제기를 받는다. 반면에 한국의 교육모델은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서술법이 한국 교육의 주축을 이룬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대부분의 나라에서 지식은 교사에게 물료받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대화가 아니라 선생님의 독백 형식으로 수업이 이루어진다‘라고 분석했다. 메이어는 한국 대학 교육의 약점을 교수 중심의 설명식 교육, 기존의 이론에 대한 의심 부족, 다양한 토론의 부재에 있다고 지적했다. (151)
  • 그는 한국의 주입식 교육은 남들이 해놓은 것을 빨리 배우는 장점이 있지만 대신에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을 빼앗고, 자기 생각을 밀고 나가는 힘과 자신감을 축소시킨다는 비판도 빼지 않는다. (152)
  • 아인슈타인은 “진리의 가장 큰 적은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대이다(Unthinking respect for authority is the greatest enemy of truth)”라고 말했다. (152)
  • (…) 1901~2018년까지 노벨상 수상자 가운데 유대계 수상자가 203명으로 전체 수상자의 약 22%였다. 2018년 전 세계의 유대인 수는 1,400만 명 정도로 추산되며 이는 남북한 인구의 1/5도 안 되는 숫자이다. 전 세계 인구의 약 0.2%를 차지하는 유대인에게서 노벨상의 22%가 나올 수 있는 열쇠는 무엇일까? 한국인들의 평균 아이큐는 유대인보다 높다. 부모들의 교육열도 그들에 뒤지지 않는다. 세계 최고의 교육열과 최다의 학습량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국제 사회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206-207)
  • 라비 총장은 “한국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려면 후츠파 정신이 필요하다. 후츠파는 이스라엘어로 위험을 감수하는 당돌한 도전 정신을 뜻한다”고 말했다. 그는 “항상 아니오(NO)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어릴 때부터 키워야 비판적 사고가 자라날 수 있다“며 “여기서 나온 국가적 에너지가 노벨상을 탈 수 있는 저력으로 연결된다”고 덧붙였다. (208)
  • 유대인 교육의 핵심은 권위 있는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질문과 토론과 논쟁을 통해 각자 스스로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스승의 위치에 있는 사람 스스로가 자신이 항상 가장 옳다는 자만에서 벗어나야 한다. 스승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스승이 말하는 것이 가장 옳은 답이라고 생각하는 문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209)
  • 한국이 노벨상을 원한다면 윗사람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아니라, 스승과 동등한 높이에서 질문하고 논쟁할 줄 아는 용감한 젊은이를 길러야 한다. (210)